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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세계예수교장로회 WPC

[황현조 박사 칼럼] “궁극적인 질문”

황현조 목사(커네티컷교협회장, 비전한인교회 담임)

“궁극적인 질문”

저명한 기독교 사상가인 C.S. 루이스 전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예수는 정신 나간 거짓 교사이든지 만인의 구주이든지 둘 중의 하나다”라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만약 당신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로 믿지 않고 있다면 당신은 그를 거짓 교사로 간주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라고 가르쳤으니까.

한 청년이 예수를 찾아왔다. 그는 불신자였고 정부 관료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생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누구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지위와 체면을 내려놓고 예수께 무릎을 꿇었으니 대단한 일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궁극적 질문은 부와 권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에 관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그는 영생의 진리에 대한 구도자였다는 점에서 훌륭한 청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별 관심 없이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 청년에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첫째, 그는 예수를 찾아왔으나 단지 선한 선생인 줄만 알았다. 예수가 자신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실 구주라는 인식을 갖지 못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러한 예수관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예수는 그저 좋은 교훈을 주는 세게 4대 성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둘째, 이 청년은 자신의 노력으로 영생 구원이 가능할 줄로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고 했다. 소위 자력 구원론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명백히 가르친다. “율법을 다 지키는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고”(롬 3:2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완전한 표준)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고 하였다.

기독교는 자력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인한 은혜 구원을 가르친다. 선행을 해야 하되 그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인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선행을 하는 열매가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선행의지와 능력을 주장하고 구원의 신인 합력설과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잘못된 신학이 있다.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 무슨 힘으로 자력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일까?

깊은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머리카락을 아무리 위로 잡아당긴다고 해서 스스로 물 밖으로 떠 오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영어 격언에도 “당신의 구두끈을 아무리 위로 잡아당겨도 당신 몸을 들어 올릴 수 없다(You cannot pull yourself up by your own bootstraps.”는 비슷한 말이 있다.

셋째, 이 청년은 자기의 궁극적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면했을 때 외면하고 예수를 떠났다.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 순종보다는 거부의 길을 택했다. 영생의 궁극적 질문을 갖고 찾아왔던 그였지만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자니 자기의 옛사람과 세상 욕심을 부인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고민과 슬픔 속에 세속의 길로 돌아가고 말았다.

뉴욕 맨해튼 5가의 RCA빌딩에 희랍의 신 아틀라스(Atlas)의 동상이 있다. 아틀라스는 자기의 모든 근육과 힘을 다해 어깨 위에 세상을 힘들게 떠받들고 있다. 그 건너편 성 패트릭 교회 제단 뒤에는 12세쯤 되는 예수님이 한 손으로 힘들지 않게 세상을 들고 있는 성상이 있다.

우리는 궁극적 구원과 영생을 위해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예수님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부자 청년처럼 그릇된 선택을 하고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의 선교적 사명이 절실히 대두된다고 할 것이다(롬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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